나의 이야기

나의 술이이야기

니이구 2008. 4. 24. 10:05
 

홍우(紅友)1) 40년

                           

논개(論介)

                  卞榮魯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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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시집(詩集) ‘조선의 마음’

  내가 읽어본 책 중에 ‘명정(酩酊)2)40년’은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수필집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의 지식인들이 보편적 사고방식으로는 세상을 볼 수 없던 그 시절에, 그 옛날 이태백이 홍우(紅友)를 친구삼아 시를 썼듯, 수주(樹州)는 홍우(紅友)를 방패삼아 일제에 항거하려했던 뜻의 느낌이 와 닿았다. 


  수주(樹州)는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이상화(李相和)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더불어 일제시대의 대표적 저항시로 일컬어지는 ‘논개(論介)’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명정(酩酊)40년’을 읽다보면, 지나칠 정도로 홍우(紅友)를 마시긴 하였으나, 일제와의 보이지 않는 싸움에서 고도의 전술적 무기로 홍우(紅友)를 택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에서 아련하기도 하고, 현재 하릴없이 홍우(紅友)를 마시는 듯한 내 모습이 참으로 겸연쩍기도 하다.


  수주(樹州)는 1897년생이고, ‘명정(酩酊)40년’은 1953년에 초판을 인쇄하였다고 하니, 1913년 즉 16세 즈음부터 홍우(紅友)를 마셨다는 것인데, 나는 그 나이보다 어린 9세 전후에 홍우(紅友)를 홀짝였던 웃지 못하는 추억이 있으니 지금의 내 나이가 ‘명정(酩酊)40년’과 같은 글을 끼적거릴 수 있는 나이가 딱 되었다. 단, 수주(樹州) 정도의 철학적이고 해학적인 부분의 흉내는 무리지만, 그저 아련한 나의 어린 시절부터 홍우(紅友)를 친구삼았던 일들을 써 보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을 주체를 못하겠음이 나의 병인가 하여, 40여 년간의 홍우(紅友)에 대한 추억을 정리해 본다.


  홍우(紅友)에 대한 나의 첫 인연은 어렴풋이 5세쯤으로 기억된다. 소꿉친구네 부엌에서, 친구 부친께서 맛보시고 주병(酒甁)을 시렁에 얹어두고 나가시는 것을 엿본 우리 꼬마 둘이 뭔지도 모르고 따라 마셨던 기억이 있다. 주전부리할 것이 귀하던 60년대 중반이고, 사고력이 없던 시절이라 몇 잔을 마셨는지도 모르고 그냥 부엌바닥에 곯아 떨어졌던 사건이 있었다. 훗날 듣기로는, 그 날이 친구네 할아버님 기제(忌祭)라 보관하던 제주(祭酒)가 괜찮은가 확인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따라 했다는 이야기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소꿉친구는 나와는 반대로 지금은 한잔만 마셔도 말 그대로 홍당무가 되어 못 마시니, 시작은 같이 했는데 결과는 영 딴 판인 것이 희한하다. 남들은 친구를 따라 강남을 간다는데, 나는 너무 어릴 때 타락아닌 타락의 길을 맛보았던 것은 아닐는지.  엊그제 친목회에서 헤어질 때 “친구야 술 좀 조금 마셔라.”하던 친구가 더욱 그립다.


  지금은 청소년보호법으로 어린이에게 술·담배 심부름도 못시키지만, 우리의 초등학교 시절에는 당연히 어른의 술·담배 심부름은 아이들 몫이었다. 그 시절엔 청소년들이 술·담배 하는 모습을 보기도 어려웠기에 믿고 시키는 풍조가 자연스러웠고, 그런 행동들이 효도의 윤리라는 범주로 간주되던 시절이기도 하였던 듯싶다.  9세 정도로 기억되는데,  아버지 친구 분들이 모이시면,  술심부름으로 주전자(酒煎子)를 들고 동네 전방(廛房)에 술을 사러 갔었고, 쥔아주머니께서 막걸리를 그득 담아주시고는 주전자꼭지로 술이 넘칠까봐 비료포대를 죽 찢어 꼭지를 틀어막아 주셨다. 오는 길에 ‘이게 도대체(都大體) 무엇이기에 어른들이 그리도 맛있게 드시나’ 하면서, 호기심 반으로 꼭지를 빼고 한 모금 두 모금 마시고는 다시 꼭지를 틀어막고는 태연히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술이 분명히 비는 것을 아시면서도 아버지는 모르는 척하셨다. 그렇게 어른들의  묵인 속에 그 시절 어린이들은 자연스럽게 홍우(紅友)를 사귀기 시작했던 듯싶다. 지금은 자기 자식에게 술·담배 심부름도 못시키게 법이라는 굴레로 옥죄어 놓았지만, 오히려 윤리는 땅에 떨어진지 오래고, 인간이나 가족간에도 정나미를 점점 떨어뜨리는 느낌은 유독 나만의 아쉬움일까? 


  내 또래들은 홍우(紅友)를 잘도 마셔대던 중학교시절에 나는 속병이 심하여, 홍우(紅友) 근처도 못 가봤고, 고등학교 때 3년은 동계방학 때마다 한 번씩은 고주망태가 되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친구들 여남은 명 가운데 나만 학생이었고, 그 친구들은 이미 사회인으로 홍우(紅友)를 마시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던 때였으니 어쩌랴.

고1때는 샴페인 석 잔에 혼수상태가 되어 사돈도 몰라보고 실수하여 술 깬 뒤에 사돈어른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고는, 아버님 앞에 끌려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 때 아버님께서는 한 마디도 꾸중하지 않으셨고, 한참 있다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라” 이 한마디로 용서를 하셨는데, 그 말씀이 종아리 1백대를 맞은 것 보다 더 무서웠고 아팠던 기억이 있다. 21년 전에 고인이 되신 아버님이시지만, 나는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용돈 한 번 주십사고 해보질 못하였고, 아버님 주머니에서 나와야 하는 용돈을 항상 어머님을 통해서 받았을 정도로 아버님의 위엄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살았던 듯 하다. 그래서 지금 나의 자식들에겐 그러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은 하지만, 잘 안되는 느낌이다. 그러한 아버님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꿇어앉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고2 동계방학 때는 동네 1년 선배가 군입대 한다하여 송별식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막걸리를 양동이에 부어놓고 동네친구들과 호기로 바가지로 퍼마시며, 그 당시 한참 유행하던 ‘Indian reservation’ ‘Keep on running’ ‘sugar sugar’를 한껏 따라 부르며 몸부림치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듬해 겨울 그 선배가 한계령 제설 작업에 동원됐다가 사고로 순직하여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고 일병 김진옥의 묘(故 一兵 金辰沃의 墓)’라는 비명(碑銘)으로 세상을 쓸쓸히 지켜가고 있어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고3 동계방학 때는 고등학교를 마친다는 기념으로 몇몇 친구들, 인근 마을의 여동창들과 밤새워 가며 무슨 순정의 꽃 같은 이야기들을 그리 했는지 모르겠다. 친구들 중에 불량스런 티를 내는 아이들도 있어서, 나는 술을 가려 마셔가며, 밤새 분위기를 건전하게 유도를 했는바, 여자친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알량한 기사도정신이 나의 작은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느껴본 순간이었다. 훗날 나의 느낌이었지만, 그 여자친구들 중에는 성인이 되어 나와 결혼까지 할 뻔한 친구가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교시절에도 항상 속병이 있어서 음식도 가려먹던 때라, 홍우(紅友)는 거의 하지 않았고, 이상의 세 번의 홍우(紅友)와의 추억만이 아련하다.


  대학시절에는 자유가 어떻고 철학이 어떠니 해가면서 괜히 선배들 흉내 내느라 참으로 막걸리를 많이도 마셨던 기억이 있다. 79학번이다 보니 고교시절까지 억눌렸던 모든 감정들이 특히, 군사정권이라는 억눌림에 반발이나 하는 것이 정당화라도 되듯 하던 시절이라 머리는 장발이요, 옷은 카키색 일색이었다. MT니 동아리활동(그 당시는 써클)이니 하면서, 틈만 나면 정치가 어떻고, 민주화가 어떻고 하며 개똥철학의 매개체가 막걸리였다, 안주라야 라면 국물에 김치가 고작이던 그 때의 홍우(紅友)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80년도에 극에 달했던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전교생의 데모 등 학원가(學院街)가 정치가(政治街)로 치닫다가 결국은 5월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그 해에 자원하여 군에 입대할 때까지 청춘의 가슴속 우울함을 안주(按酒)삼아 마시던 홍우(紅友)는 역사와 함께 하는 추억이다.

 

나의 전공은 건축공학(建築工學)이라 전공과목(專功科目) 중에 역학(力學) 과목이 있다. 원래 이과(理科) 체질이 아닌 나에게는 좀 흥미 없는 과목이었다. 그런데 학교 앞에는 허름한 막걸리집이 있었고, 그 집의 간판이 역학원(易學院)이었던 관계로, 지금도 가장 친하다는 그 때의 대학동창인 5명은 그 집에서 역학(力學)을 공부한다는 핑계 삼아 어설픈 역학(易學)을 듣기도 하고, 막걸리 잔을 기울여 가며, 우정을 쌓아 남들이 시기(猜忌)할 정도의 친구사이로 지내고 있다.


복학 후에 한 번은 고등학교 동창이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나에게 놀러왔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아버님 사업의 실패로 굉장히 어렵게 자취(自炊)를 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홍우(紅友) 한잔하러 나가자고 해, 시내 번화가(繁華街)의 맥주 집에 들어가서 몇 병인가 마시고는 일어나면서 계산을 할 때였다. 친구가 돈이 없단다. 그 친구는 그래도 산다는 집 자제(子弟)였는데, 우리는 앞이 깜깜하였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나의 싸구려 전자 손목시계와 지폐 몇 장 정도였는데, 그거라도 맡기고 다음날 꼭 갚겠다고 하였으나, 별안간(瞥眼間) 어디선가 건장한 청년 수명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쥐어박아 가며 윽박질렀고, 그 술집 아가씨들의 돌변한 태도와 더불어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것 외에는 아무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그 곳이 양반의 고장이라고 자처하는 곳인지라, 허름한 내 모습과 군바리 모습을 흘겨보고, 어수룩한 우리의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주머니 속의 지폐 몇 장 받고는, 꿀밤 몇 대를 쥐어박은 후에 ‘다시는 이런데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며 내보내 줘서 나왔는데 차 삯이 없어서 4Km정도를 터덜터덜 걸어왔던 아픈 추억이 있다.                 


우리 고향(故鄕)집은 남한강 중류인 여주(驪州)의 강변인지라, 청년시절에 집에 머물 때는 동네 친구들과 툭하면 강변에서 투망(投網)으로 잡은 생선(生鮮)으로 매운탕에 소주 한잔하던 것이 지금에 와서도 잊을 수 없는 낙(樂)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강가에서 매운탕을 끓일 때는 솥단지와 고춧가루, 고추장, 소금  등 약간의 양념과 소주 한 병만 들고 나가면 훌륭한 천렵(川獵)잔치가 되었었다. 매자, 모래무지 등 지금도 1급 생선으로 대접받는 생선을 한 대접 잡고, 강가 아무 밭이나 들어가서 풋고추, 들깻잎, 마늘, 파 등의 양념을 조금씩 슬쩍해다 먹어도 죄가 되는지 모르고 자라던 시절이었다. 그 때의 소주 한잔이 가장 자연과 벗 삼아 마시던 홍우(紅友)가 아니었나 싶다. 비가 오는 날에는 생선을 잡아 대개는 우리 집으로 모이곤 했다. 아버님 시절부터 사람이 꼬이는 집으로 당연한 듯 우리 집에서 매운탕을 끓여먹곤 했다. 집에서 끓이면 항상 아버님께 먼저 한 대접 갖다 드리고, 그 다음에 친구들과 같이 먹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매운탕만 드렸던 것이 후회로 남는다. 소주 한 병 더 사서 같이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말이다. 이제는 부질없는 생각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사랑방에서 맛나게 끓여대던 매운탕과 아버님께서 맛있게 잡숫던 그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군대시절에 홍우(紅友) 때문에 미귀(未歸)로 혼날 뻔한 기억도 있다. 2박3일 휴가 때였으며, 마지막 날 이웃동네 형님네 인사를 갔었는데, 형수님이 담그신지 1년이 된 진달래술을 꺼내오셨다. 꿀같이 달면서도 찐득찐득한 것이 입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친구와 같이 갔었는데 둘이서 한 동이를 다 비우고는 저녁 6시까지 성남에 소재한 부대로 귀대를 하려면 여주읍내에서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 가는 2시 시외버스를 타야했었다. 다행히 친구는 늘 시골에서 홍우(紅友)를 마시던 터라 나보다는 덜 취해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나를 데리고 와서는 차를 태우고 전송하여줬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홍우(紅友)를 이기지 못한 나는 이내 곯아떨어졌고, 경유지인 성남 모란 터미널에서 내려야 됐었는데, 마장동까지 갔던 것이다. 82년 그 당시만 해도 시외버스엔 조수(助手)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조수(助手)가 계속 깨우는 통에 간신히 눈을 떠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은 7시요, 장소는 마장동이었다. 전화도 쉽지 않은 시절이라 전화도 못한 채 부대에 오니 9시였다. 죽었다고 각오를 하고 뒷문으로 귀대를 하고 보니, 다행히도 후배들이 얼렁뚱땅 마무리하여 영창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오싹하면서도, 그 형수님의 진달래술의 향취가 그리워진다.


  90년도에 공무원으로 첫 발령지(發令地)에서 근무(勤務)할 때,  홍우(紅友)로 인해 죽을 고비도 넘겼던 기억이 있는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반대로 내 운명(運命)이 참으로 길겠구나 하는 안도감(安堵感)이 생기기도 한다.

   

충남(忠南) 대천시(大川市) 원동사무소(元洞事務所)에서 공무원(公務員)을 시작했는데, 그 해 10월에 시민의 날 체육대회가 있었고, 나는 씨름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6개동 대항에서 당당히 씨름부가 우승(優勝)을 하여 뒤풀이로 회식(會食)을 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씨름선수들과 하는 술자리였는데, 나는 그 때만 하여도 잘 먹지도 못하는 보신탕(補身湯)집에서 하게 되었다. 수육(熟肉)3)도 그 때 처음 먹어봤지만, 맥주잔에 연거푸 소주 세잔을 마시는 것도 그 때 처음 보았던 것이다. 나도 술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던 30대 초반이라 선수들과 보조(步調)를 맞추려 안간힘을 썼었는데, 다른 직원이 데리러 왔을 때는 이미 과(過)함이 도(度)를 훨씬 지난 뒤였다. 직원들이 이끌어 하숙집 앞에다 내려주고 들어가라 해놓고는 돌아간 시간이, 나중에 들으니, 저녁 10시라 했는데, 사단(事端)은 그 때 벌어진 것이었다. 발길이 50m 전방의 하숙집으로 향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여, 걷다가 걷다 하도 다리가 아파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3시였고, 이상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면서 되돌아 얼마쯤 내려오니 시내의 변두리인데 슈퍼마켓이 있었다. 마침 주인이 문을 닫고 있는 중이었고 가게 앞에는 평상(平床)이 놓여져 있었다. 주인에게 사정하여 평상(平床)에서 잠시 쉬었다 가겠다하니, 주인이 보기에도 가관(可觀)이었던지, 안된다고 하면서 시내 가는 길을 가리켜 주고는 등을 떠밀어 얼마나 야속했는지 모르겠음을 접어두고는,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걸어 얼마쯤 오다보니, 시내 야경이 눈에 들어왔고, 마침내 힘을 내어 집에 들어오니 새벽 5시였다. 이튿날 직원들에게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했더니 웃음 반(半) 안도(安堵) 반(半)으로 화답(和答)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떠 또렷해진 이유는 그 해 겨울의 사건 때문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보령군과 대천시가 나뉘어져 있었으며, 보령군청도 대천시청과 우리 원동사무소 지척(咫尺)에 있었다. 군청직원이 나와 같은 경우를 당하고는 동절기(冬節期)탓에 그만 짚 앞 논두렁에서 동사(凍死)한 사건이 있었는데, 얼마 전의 내 경험이 전초전(前哨戰)이었던 것 같은 악몽으로 다시금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나와 같이 동사무소에 근무하던 직고참(直古參)도 얼마 전 소식에 의하면 위암으로 저세상으로 갔다하니 쓸쓸한 추억일 뿐이다.


  많은 홍우(紅友)사건(事件)이 있지만,

얼마 전 근무처에서 근무하면서 겪은 한 가지를 언급하면서 마무리 하고자 한다. 현 근무처가 언론인들과 밀접한 자리인지라 가끔 그 들과의 회식자리가 있다. 지난 9월 어느 날에는 일간지방지 기자들과 회식이 있었는데, 그 날 무릎을 맞대고 술잔을 기울이던 분이 그 이튿날 부음의 소식을 전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장지에 가서 하관식(下官式)을 보면서 문득 생각 난 글을 적으며, 마치고자 한다.


제목 : 합연장서(?然長逝)4)

오늘의 안개무리 無心해 보입니다  每아침 보아오던 自然의 現狀인데

이처럼 時間軌迹 따름이 運命이고  가고옴 모든것이 쳇바퀴 돌림이라

엊그제 무릎대고 한盞을 하였건만  北邙山 먼저가니 또다른 人生살이

山은山 물은물이 헛된말 아니로다  하늘의 부름받음 이것이 死別인가

이승을 산것처럼 저승도 살아보고  안개속 그림자마냥 그냥저냥 가시네.

                                               2007. 11. 5.  梨湖  姜求仁     



1) ‘얼굴을 붉게 하는 친구(親舊)’로 ‘술’의 이칭(異稱)


2) 술에 잔뜩 취함. 만취(滿醉)


3) 삶아 익힌 고기. 숙육(熟肉)에서 변한 말


4) 갑자기 세상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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